[예배이야기 SEASON2] 예배와 사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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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요?

예배가 미치는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요? 예배당 안 뿐일까요? 우리가 모여있는 그 공동체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배의 위력을 가늠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6-8)

 


ⓒ Mastrangelo Reino

 

 

예배의 위력은 분명히 개인의 영역 이상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가지는 의미와 파급력은 단지 개인의 차원이 아닙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을 우린 지금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예배의 결과는 어떤 제물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물론 흠 없는 제물을 드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예배가 종료된다면 우린 합당하지 않거나 무언가 부족한 예배를 드린 것일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의 파급력은 사회 속의 정의를 만들어냅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더불어 정의를 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각자의 영역 안에서 정의를 회복시키는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3:11)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11:20-22)

 

 

 

 

 

교회의 하나됨, 즉 예배 안에서 하나됨은 정의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노예부터 왕까지 존재하던 신분제 사회의 시대에 놀라운 급진적 발언을 합니다. 민족과 신분을 초월해서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라는 증언입니다. 이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에겐 당연히 여길 만 하지만, 지금 시대에 신분제도의 복귀를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시대를 역행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의 출신과 신분은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갈등은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에서 식탁교제는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성찬과 더불어 한 끼를 충분히 먹는 애찬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라는 놀라운 표지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식탁이 분리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아님을 꾸짖고 있습니다.

예배는 교회가 공동체로 하나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로서 지체들을 연결해주고 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 정의의 시작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 안에서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우린 예배를 통해 확인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소외되고 경제적, 정서적 부족함 가운데 살아가는 지체들을 향한 사랑과 돌봄이 교회 안에 반드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 안에서도 경제적 능력이나 직업의 사회적 위치로 신분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풍조 때문에 교회의 하나됨이 깨어지고 방해받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힘을 잃을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사도적입니다

이것은 어떤 은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처럼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모임인 동시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도의 의미에 충실한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함께 섞이는  동시에 세상에 확산되는 화학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영역에서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로 나아갑니다.  노예가 해방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이 되어준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의를 실현한 그 근본은 자신이 예배하는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13:1)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딤전2:1-2)

하나님은 “국가”라는 기관을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억제시키고 또한 양심에 따라 살 수 있게 도우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단지 교회가 아닌 전 세계 모든 인류라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십니다. 세상에 세워진 권위자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음을 알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권세자들, 정치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의 많은 교회개혁가들이 적극적 정치 행동을 요청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것도 중요합니다. 다만 그 시작은 그들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그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을 심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나 어떤 부류의 부당함에 분노해 저항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의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린 먼저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그 행동엔 언제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용서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는 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나라의 예배라면…

그 파급력이 사회 속에 녹아들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완벽할 수 없고 우리 역시 우리의 욕심에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작, 온 열방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시간의 시작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합당한 예배가 아니면 합당한 정의도 없습니다.

 

 

오 주님!! 이 땅의 모든 불의함 가운데 방치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도우소서!!
그리고 우리를 보내소서!! 아멘

 

 

 

“God of Justice” by Tim Hughes

 

 

PS. 이 칼럼의 대한 질문이나 나눔은 unclebin@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Author: 정 형빈

안녕하세요!! 오픈워십의 정형빈 간사입니다.^^